지난 2024년 3월 23일.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향년 82세. 한동안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과 그로 인한 연주회 취소 뉴스가 심심치 않게 전해졌었지만 그래도 활발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였기에 부고 소식이 때이르게 다가온 듯합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지만 단순히 피아노의 거장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음악가였습니다.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지만 쇼팽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만은 아니었던 피아니스트. 독일, 오스트리아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작품을 냉철한 피아니즘으로 소화해 냈던 음악가. 그리고 열정적인 현대음악의 옹호자. 기술과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측면 등, 여러모로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비교 대상이 보이지 않는 음악가였습니다. 오늘은 먼저 떠나간 사람을 기리며, 이 위대한 음악가가 남긴 음악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1960년에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나이는 불과 18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이 참가자가 우리들보다 낫다”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어린 폴리니의 연주력은 압도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연주회를 적정 수준에서 유지하며 레퍼토리 확장에 힘썼던 1960년대를 보낸 그는 1970년대가 되자마자 어마어마한 앨범을 차례로 내놓으며 음악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72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된 쇼팽의 <연습곡 Op. 10>과 <Op. 25> 음반은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성취로 기록됩니다. 애호가들에게는 경탄을, 그리고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음악가들에게는 절망을 안겨주었던 전설적인 앨범이죠.
1975년에 발매된 쇼팽의 <프렐류드 Op. 28>은 앞서 발매되었던 연습곡의 위상을 그대로 이어가는 앨범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테크닉과 음악성을 바탕으로 각 곡의 특징을 명료하게 살려낸 폴리니의 연주는 이 작품 연주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음반이라는 것이 세상에 나온 이후 압도적인 성취로 기록될 앨범이 몇 있는데, 폴리니의 이 두 음반은 단연 음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앨범이라 하겠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악가는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독일 출신 피아니스트들은 독일 음악에, 그리고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은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인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유독 독일, 오스트리아 음악에, 특히 고전주의 시대 작품에 강점을 보였던 피아니스트로 기억됩니다. <피아노 소나타 28번>부터 마지막 소나타인 <32번>이 담겨 있는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모음집은 앞서 소개해 드렸던 쇼팽 음반들에 이은 명반입니다.
슈만과 슈베르트 작품에서도 폴리니는 좋은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탄탄한 기교와 잘 어울리는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그리고 슈만의 <환상곡>은 지금도 작품을 대표하는 명연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가 쓴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은 협연자 마우리치오 폴리니에게 가장 각별한 협주곡이겠습니다. 절친한 동료인 클라우디오 아바도와는 두 차례, 이후에는 독일 음악의 떠오르는 거인이었던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한 폴리니. 그중에서 오늘은 아바도, 빈 필하모닉과 함께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성기 폴리니의 타협 없는 터치와 빈 필의 유려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어우러지는 명연주, 한번 감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연주자들에게는 어떤 경향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쇼팽,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주로 무대에 올리는 연주자들은 대체로 현대음악을 즐겨 연주하지 않죠. 특정 시
그러나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우리 시대의 현대음악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한 이후 스트라빈스키의 난곡인 <페트루슈카>를 녹음한 이 피아니스트는 프로코피예프와 베베른, 그리고 슈토크하우젠과 불레즈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현대음악을 향한 어마어마한 애정을 보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과 쇤베르크의 <피아노 협주곡>이 같이 담긴 앨범은 그만이 내놓을 수 있는 조합이겠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만나는 일,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음악 세계에서는 가능합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에게는 다니엘레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습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1978년생의 이 아들은 이미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해 활동하고 있으나 성장하는 내내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사는 것의 어려움을 몸소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마우리치오 폴리니는 커리어 말미에 발매된 클로드 드뷔시의 앨범 마지막에 아들과 음악으로 만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부자가 함께 연주하는 작품은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백과 흑으로>. 그리 진지하지 않은, 소품에 가까운 작품을 듣고 있는 동안 위대한 음악가이면서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사람, 그리고 은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평생을 피아노 앞에서 보냈던 사람의 일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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